서희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 속 주요 인물은 대부분 전투를 수행한 장군이다. 이 중에서 뛰어난 외교술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 인물이 있어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중고등학교시절 항상 외워왔던 서희의 담판에 나오는 서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고자 한다.
1. 서희의 성장
서희(徐熙)는 943년 광종대에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본관은 이천이고 아명은 염윤이다. 서필은 대쪽 재상으로 유명했다. 서필은 광종 11년이 되던 해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광평성과 원외랑 등을 지내며 승진을 계속 하였다. 서필은 광종이 귀화인을 중용하려고 할 때 이 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고관임에도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한 서필은 왕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할 만큼 대쪽 같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서희는 아버지의 곧은 성격을 물려받은 듯하다.
2. 서희의 활동
서인은 부친의 대쪽 성품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서희가 31세때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것을 기회로 유능한 외교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후주와 유대관례를 유지하던 고려는 후주 멸망 후 송이 들어서자 서둘러 외교관계를 맺는 등 기민함을 보였다. 그러나 거란이 등장하자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외교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다 광종 23년 972년에 다시 송나라와 외교를 재개하였다. 이때 십여 년간 단절되었던 외교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서희이다. 당시 송 태조는 서희의 태도와 예법이 절도 있음을 높이 평가하여 송나라의 검교병구상서라는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서희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보였고 993년 거란이 침입할 때에는 정2품의 내의시랑 지위에 있었다. 그러다 거란이 침입하자 성종은 서희를 중군사에 임명하여 북계지역을 방어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서희의 담판
이때 고려는 거란과의 화친이냐 주전이냐 두고 내부 공방을 벌이고 있었고, 그러던 사이 거란 장수 소손년은 지금의 안주 지방인 안융진을 공격하였다. 소손녕의 편지를 받은 고려가 답변을 늦추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군에 패하였다. 안융진 공격이 실패한 후 소손영은 항복을 종용하는 서신만을 연달아 보냈다. 소손녕의 편지가 계속되자 성종은 적진에 신하를 보내 이를 담판 짓고자 했다.
성종은 신하들에게 혀로 적을 구슬려 공을 세워보지 않겠는가 물었고, 이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서희는 자청해서 나서서 국서를 받들고 적진으로 가 상견례 방식을 정하고자 통역관을 소손녕에게 보냈다.
소손녕은 뜰에서 절하기를 요구했고 이에 서희난 당당하게 신하끼리의 절을 거부했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실랑이가 있었으나 서희의 당당한 태도에 결국 소손녕이 두 손을 들었다.
어렵게 자리를 마련한 두 사람은 협상을 시작했다.
소손녕의 요구는 송나라와의 화친을 끊고 옛 고구려 땅을 떼어주고 거란과 화친을 맺는 것이었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하여 오히려 소손녕의 군을 물러가게 하였다. 서희의 말에는 조리가 있고 태도에는 기백이 있었다한다. 담판이 끝나자 소손녕은 서희의 인품과 뛰어난 화술에 감복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서희는 여진을 소탕한 뒤에 거란과 화친을 맺기를 간하였으나 불안한 성종은 서희의 요구를 묵살하고 거란과 국교를 맺었고 이때부터 거란은 송나라를 대신하여 자신의 종주국 행세를 하려했다.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까지 넓어졌다. 그리고 강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