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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신립에 대하여

by 호기심많은 부가옹 2023. 11. 10.

팟캐스트에서 괜찮은 방송을 찾아 운동하거나 이동 중에 듣는 편이다. 어느날 팟캐스트를 듣다가 진행자들끼리 어떤 사건을 신립에 빗대어 말하며 자기들끼리 공감하며 얘기했다. 그런데 신립에 대해 이름만 생각날 뿐 무슨 업적이 있는 사람인지 생각나지 않아 개인적으로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신립과 탄금대에 대해서 간략하게라도 알아보기로 했다

 

1. 신립의 생애

신립의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입지(立之)이다. 신개(申槩)의 현손으로,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신상(申鏛)이고, 생원 신화국(申華國)과 첨정 윤회전(尹懷貞)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립은 어리 때부터 독서보다는 무예수련을 좋아했다고 하고 22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친 후에 진주에 판관으로 부임한다. 이때 문장가로 이름을 펼치던 진주목사 양응정을 스승으로 삼아 배웠고, 스승인 진주목사는 신립의 거친 성격을 고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2. 신립의 활동

1583(선조 16) 함경도 최북단에 위치한 온성의 부사로 있을 때 이탕개를 중심으로 한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였을 때 유원첨사였던 이박과 합세하여 적병 50명을 척살하고 두만강을 넘어 적국을 추격하여 소굴을 소탕하였다.

또 북장의 주요 방어지 중 한 곳인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에 침입한 야인들과 종성지역에 다시 침입한 이탕개의 1만여명의 침입군을 물리쳤다.

평상시에도 철기(鐵騎) 500여 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야인들이 그 군대의 민첩함에 모두 놀랐다고 한다. 이때 육진(六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신립의 용맹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립이 다음과 같이 승전을 계속하자 조정에서는 15843월에 신립을 함경북도 병사로 임명하고 공복과 환도 등을 하사하였다. 신립의 노모에게는 매일 고기와 술을 보냈다고도 한다.

 

15872월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왜척 18척이 침입할 때 토벌을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은 철수한 뒤라 돌아오면서 양가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되기도 했으나 곧 다시 함경남도 병사로 임명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야인 부락에 출정하여 적병을 목 베고 말을 빼앗아 돌아오기도 했으나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1590년 내직인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이때도 항상 군비의 부족함에 대해 논하고 준비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은 신립을 삼도 도순변사로 임명하고 보검을 하사하였다. 신립은 유성룡 막하에서 부장 김여물과 군관 80명을 거느리고 충주로 떠났다. 이때 군사에 대해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인 시정백도 수백 명을 모병하여 함께 떠났다.

이때 순변사 이일이 경상도 상주에서 왜군에게 패한 후 신립에게까지 쫓겨 와 죽여줄 것을 청하였고 신립은 이일의 재주를 귀히 여겨 그를 용서하고 선봉장으로 삼았다. 이때 이일은 왜군의 정세가 대적이 불가능할 만큼 대군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여물 등의 수하들은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감안하여 조령에서 잠복하여 전투를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기병의 활용을 극구 주장하며 군대를 돌려 충주 북쪽 4지점에 있는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을 기다렸다.

 

같은해 428일 배수의 진에도 불구하고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규모로 공격해오자 중과부적이었던 아군은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였고, 신립의 군대를 믿고 피난하지 않았던 일반 백성과 관속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아군이 대패한 후 신립은 김여물, 박안민 등과 함께 남한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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