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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양규 장군에 대해

by 호기심많은 부가옹 2023. 11. 21.

학교 다닐 때 국사과목을 아주 좋아했다. 정말 재미있어서 공부했던 과목이었다. 중학교때는 어쩌다 한문제 틀리면 국사선생님이 불러서 왜 이것이 답이 되는지 맥락을 설명해 주실 정도였다. 수능에서 별로 중요한 과목이 아니라 점점 공부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국사책을 읽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나 국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다보니 관심이 점점 멀어졌고 그러다보니 고려사에서 주요사건은 생각도 안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전 고려거란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시작되었고 그것과 맞춰 가끔 관심있게 보던 역사관련 유튜브에서 고려사를 설명해주었고 그 역사학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고려의 최고의 장군 중 한명이 양규라고 했다. 

양규는 국사교과서에서 이름이 한번정도 거론되었던 것 같다. 낯설지는 않지만 주요 인물은 아니었던 사람이었다. 

고려거란전쟁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양규라고 해서 따로 알아보고 싶어졌고 그의 삶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개요

거란 최고의 정복 군주였던 성종 야율융서가 직접 고려를 처들어왔을 Eo thtn 정예의 고려군을 이끌고도 거란군을 격파하여 고려인 포로를 구출해낸 영웅이다.

 

2. 초기

거란 전쟁 이전 양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양규열전에 고려의 제7대 왕인 목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형부낭중이 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6대 왕인 성종의 말년 쯤에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 강조의 정변이후 현종이 옹립된 후 거란이 4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 무렵 양규는 도순검사가 되어 국경에 가까운 흥화진에서 3천여명의 병력을 데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양규의 전임자가 강조의 정변을 일으켰던 강조였던 것으로 보아 양규는 어떤 식으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3. 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명을 이끌고 양규가 지키고 있었던 흥화진을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양규는 3천군사를 데리고 이 공격을 막아냈다. 성종은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규를 비롯한 흥화진의 장수들은 정중한 말로 항복 권유를 거절했고, 이에 성종은 다시 선물을 보내며 항복을 종용했지만 다시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성종은 20만명의 병사는 남겨놓고 20만명을 이끌고 남하해서 수도를 향해 지격했다. 그리고 강조의 대군 30만명을 격퇴하고 강조를 붙잡아 처형했다. 그리고 거란 성조는 강조의 서신으로 위조하여 항복문을 흥화진으로 보냈는데, 이에 양규는 우리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라고 이 요구를 일축했다.

 

이후에도 거란군은 수도 개경으로 남하하는 길에 서경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이때부터 양규의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된다.

 

4. 대활약

서경이 거란군의 공격을 받고 있을 즈음, 양규는 흥화진에서 결사대 700백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군사 1천명을 수습했다. 이는 은밀히 부대를 운용해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야간에 거란군이 중간 기지인 곽주의 6천 거란군을 몰살하고 성을 탈환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곽주전투가 거란고려 전쟁사에서 가장 주요한 승리 중 하나라고 한다. 이 전쟁으로 거란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거란은 서경 공격을 실패하고 그대로 개경으로 진격하여 101111일 성종은 개경의 성을 불태웠다. 그러나 현종은 남쪽으로 이미 몽진을 떠난 후였다.

이에 거란은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양규는 남은 거란군을 계속 공격하여 포로를 구하고 적의 후미를 공략하여 적의 목을 베었다. 양규의 목적은 극도로 지친 거란군에게 지속적인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고려 포로를 최대한 많이 구출해 내는 것이었다. 양규를 대단한 장군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법이다.

 

양규는 원군도 없이 한달의 짧은 기간에 7번이나 싸워 무려 삼만명에 이르는 포로를 구해냈다.

 

5. 사후

전쟁 후 현종은 양규를 공신으로 삼아 공부상서로 추증하고 양규의 아내에게는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섬을 지급했고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 신은 태조 왕건이 개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 뒷날 고려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신흥사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6. 평가

양규는 고려에서도 가장 훌륭한 장군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소규모 군대를 활용한 게릴라전을 수행했고 수성전 공성전에도 뛰어났다. 활약 시간이 짧아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최고의 장군 중 한명이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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