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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신돈은 혁명가인가 요승인가

by 호기심많은 부가옹 2023. 11. 8.

고려사에 유명한 사람 중 하나가 신돈이다.

혁명을 꿈꾸다 권력에 맛에 빠져 고려를 망하게 한 요승정도로만 알고 있는 신돈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1. 신돈의 출신

신돈(辛旽, ? 1371)은 혁명가와 요승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로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출생부터 알아보고자 한다. 신돈의 어머니는 현재 창녕인 계성현 화왕산에 위치한 옥천사의 여종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편모슬하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돈의 본관이 영산(靈山)이고 묘도 영산에 있다는 것으로 판단할 때 부친은 영산의 유력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편모슬하에서 사찰에서 일하는 여종의 자식으로 자란 탓에 신돈은 자연스럽게 중이 되었고, 다시 법명은 편조(遍照)였는데, 신돈은 훗날 공민왕을 만난 뒤에 만든 속세의 이름이다. 여종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신돈은 중들 사이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겉도는 어린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승려이긴 했지만,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던 신돈은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불교세력에 반감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공민왕과의 만남

 

그가 절을 떠나 개경으로 온 시기와, 왕실과 접촉하게 된 시기와 계기 등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신돈과 공민왕은 공민왕 7년인 1358년이었다. 이때는 노국공주가 아직 살아있었고, 집권층이 신돈을 경계했기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펼치기 위해 귀족 집권층과 거리를 두려고 하던 시기였다. 공민왕의 새로운 계획에 적합한 인물로 신돈이 선택되었다.

 

공민왕이 신돈을 발탁한 것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민왕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칼을 든 어떤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때 한 스님이 달려와 자신을 구해주는 꿈이었다.

공민왕이 꿈을 꾸고 난 얼마 후, 홍건적의 침략 시 공민왕을 호위했던 김원명이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와 인사를 시켰는데, 그 사람이 바로 공민왕이 꿈에서 본 승려인 신돈이었다. 이후로 공민왕은 신돈을 자주 불렀고 노국공주가 죽은 뒤에는 그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고는 했다.

 

3. 신돈의 정치활동

 

1365년 공민왕 142월 공민왕의 비였던 노국공주가 난산 끝에 사망하게 되면서 신돈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한다. 이 시기에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를 하사받고 왕의 사부(師傅)로서 활동한다.

공민왕은 즉위 이후 14년 동안 줄기차게 반원정책을 추진하고 내정개혁을 꾀하였으나 안팎으로 거센 반발과 도전을 받아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홍건적을 격퇴하고 부원 세력을 제거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노국공주의 사망 후에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신돈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며 그에게 국정을 일임했다.

 

공민왕의 신임을 얻은 신돈은 백성을 위한 개혁을 펼친다.

신돈은 귀족들에게는 천하에 나쁜 요승이었으나, 백성에게는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신돈은 그야말로 민생정치를 펼쳤다.

먼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토지제도와 노비제도를 혁신했다. 신돈은 서울은 15, 지방은 40일의 기한을 주고 그 동안 권세가와 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았던 전민(田民)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또한 천민이나 노예가 양민이 되기를 호소하면 그 청을 모두 들어주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이라고 추앙하며 대대적으로 환영했지만, 권문세가는 격분했다.

또한 신돈은 과거시험제도를 개혁하여 젊은 실력가들을 발탁하였다.

신돈의 개혁정치에 맹렬하게 저항하는 권문세족에게 대항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민왕과 신돈은 권문세족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젊은 신진관료를 양성하는데 과거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신돈은 개혁정치를 위해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요구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사람의 참소를 믿지 않아야 세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에 공민왕은 다음과 같이 서약하며 절대적인 신임을 약속하였다.

스승이 나를 구하고 내가 스승을 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이 맹세는 불천이 증명하리라.” 그러나 이 맹세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4. 신돈의 안하무인

신돈의 개혁이 계속되고 권력이 높아짐에 따라 신돈의 행동이 무도해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제거하기로 했다. 먼저 공민왕에게 신돈을 탄핵했고, 엄부흥, 이존오 등은 신돈이 양기를 북돋우기 위해 백마의 신장을 회 쳐 먹는다, 또는 지렁이도 산 채로 먹는다는 등의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다. 나중에는 늙은 여우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신돈이라는 말도 흘렸다. 이때만 해도 공민왕은 신하들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무렵 신돈은 공민왕에게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했고, 선왕이나 왕후의 능을 찾을 때도 무릎을 꿇고 절을 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 있을 정도로 권력을 누렸다. 원로 중신인 이제현이 나서서 목숨을 걸고 공민왕에게 신돈과 거리를 둘 것을 간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이제현은 죽음을 면했으나 그의 문도들은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신돈은 이제현의 문도들이 벼슬을 얻지 못하도록 과거제도를 아예 폐지하기도 했다.

 

5. 반역자 신돈

말년의 신돈은 자신을 배척하려는 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에 신돈은 권문세족의 권력을 더 약화시키고자 공민왕에게 음양설을 들어 천도를 지속적으로 권유했다. 공민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개경은 바다와 가까워 외적의 침략이 쉬우니 바다와 먼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공민왕과 신돈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재위기간 동안 공민왕은 권력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부원세력도 그랬고, 권문세족도 그랬다. 자신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권력이 한 곳에 몰리면 제거해 버렸다. 신돈이 사심관제를 부활시켜 5도 사심관에 직접 오르려하자 공민왕이 신돈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돈은 눈치 빠르게 왕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먼저 공민왕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신돈은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신돈은 구기 직전까지도 역모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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