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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인조반정에 대해

by 호기심많은 부가옹 2023. 11. 8.

광해군의 실정에 반정을 일으며 권력을 잡은 인물이 인조다.

반정이라는 것이 그냥 마음만 먹는 것이 아니라 내 운명을 맡기는 일이다.  여러 사람을 믿고 모의를 해야 하고 계획도 세워야 하고 결단도 내려야 한다. 그런 큰 결단을 내리고 권력을 차지하여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인조다. 그래서 예전에 피상적으로 역사를 알 때에는 인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병자호란과 소현세자와의 관계, 후궁들의 알력 등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서 선조에 버금가는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이 변한 것일까? 

인조반정이라는 사건은 구국을 위한 결단이 아니었던 것일까?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 후궁의 치마자락에 싸여 아들을 시기질투하고 손자까지 죽였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인조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1. 인조반정이란

 

광해군 15년인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그 시기 집권당파인 이이첨을 대표로한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2. 역사적 배경

 

광해군은 즉위 이후 왕위의 안정에 불안을 느꼈고 정세의 변화에 따라 위협이 될지도 모를 동복형인 임해군과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그러다 임해군을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진도로 귀양 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긴 후 대북파 정인홍과 이이첨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원익 이항복 등의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해군을 살해하게 했다.

 

그리고 서얼출신 7명이 은나라 상인을 살해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칠서지옥이라는 사건을 일으켜, 이를 핑계 삼아 영창대군의 외주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폐하였다. 또한 선왕인 선조의 유훈을 받드는 신하인 신흠, 박동량, 서성, 한준겸을 내쫓았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어났고, 이이첨 등이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하도록 놔두었다.

 

대비 김씨에 대해서도 계속 압박을 가하고 즉위 9년 차인 1917년에 이르자 폐모론을 내세웠다. 이에 반대하는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김덕함 등을 멀리 귀양 보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의 청에 따라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칭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 제공을 감하고 왕을 조정에서 찾아본다는 조알을 중지시켰다.

그 후에도 실권을 잡은 이이첨은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영의정이었던 박승종 등의 방해로 실패한 적도 있다.

 

이와 같이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의 존호를 박탈하고 동생을 살해함.) 등의 사건이 그렇지 않아도 대북파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눌려있던 서인 일파가 뭉치고 반정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구실을 제공하였다.

 

3. 인조반정의 내용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이 위에 열거한 실정을 이유로 무력 정변을 기도하였다. 이귀는 김자점과 함께 당신 인망이 높았던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대북파 정권을 타도하고 능양군 종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1623313일 밤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은 병력 600명을 모아 홍제원에 모여 김류를 대장으로 삼았고, 능양군은 친병을 거느리고 이서의 병력 700여 명과 합류하였다.

 

먼저 창의문을 통과하여 창덕군으로 향했다. 당시 군중에서 연회를 열고 있던 광해군은 반권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피신하였다. 능양군은 옥새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 중이었던 대비 김씨에게 바쳤고, 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 시켰다. 이가 바로 인조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은 의관이었던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었다. 대비 김씨는 광해군을 처형하려 하였으나, 인종의 간청을 받아들여 서인으로 내려 강화로 귀양 보냈다. 대북파인 이이첨, 정인홍, 이위경 등 수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여 명을 귀양 보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33명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 훈호와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논공이 불공평하여 서인 간 반목이 일어났고 이는 1년 뒤 이괄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서인이 제1 세력이 되고 남인이었던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들어오게 되면서 남인이 제2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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