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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소현세자와 인조

by 호기심많은 부가옹 2023. 11. 6.

우리나라 역사 속 안타까운 순간 중의 하나가 소현세자의 죽음이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펼쳤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조와 같은 왕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그의 삶이 굴곡진 만큼 안타까움도 커지고 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로 인한 의구심도 강해진다. 그래서인지 소현세자를 질투한 인조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만들어졌다.

작년에 아주 재미있게 본 올빼미라는 영화도 소현세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재 방영중인 연인이라는 드라마에도 소현세자와 강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 병자호란 전 소현세자

성은 이(), 이름은 왕이고, 시호가 소현(昭顯)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장남으로,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 소생이다.

소현세자는 1612(광해군 4) 음력 정월 4일에 태어나, 인조 반정이후 인조 3년이 되는 1625년 정월에 왕세자로 봉해졌다. 1627, 인조5년 정묘호란때에는 이원익, 신흠 등과 함께 무군사를 설치하고 전주로 내려가 분조(分朝)의 업무를 담당했고,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인조를 호위하여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참의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와 혼인하여 경선군(慶善君) 이석철(李石鐵, 16361648), 경완군(慶完君) 이석린(李石磷, 16401648), 경안군(慶安君) 이석견(李石堅, 16441665),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1655),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1682),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1654) 33녀를 두었다.

 

2.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

1635(인조13) 모친인 인열왕후가 죽어 상을 치는 중 1636(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때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2월 세자빈과 함께 청의 볼모가 되어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지금의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 뒤 소현세자는 1640, 1644년 봄에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 외에는 9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게 된다.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하자 그해 가을 북경으로 옮겼다가 1645, 인조 23년이 음력 2월이 되어서야 억류가 풀려 귀국할 수 있었다.

 

3. 볼모 시절 소현세자의 역할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는 외교적으로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경우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이는 역으로 친명배청의식을 강화시켜 국내 여론이 좋지 않았고 이로 인해 청나라와 자주 외교적 마찰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던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와 사냥을 하고 각종행사에 참여하며 고위인사들과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유지하였고, 조선인 포로의 속환 문제와 청나라의 조선 병력 지원 문제 등 여러 어려운 정치 경제적 문제들을 떠맡아 처리했다. 북경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과의 교류를 통해 서방문화를 배웠다.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을 선물받기도 했다. 소현세자와 아담 샬 사이의 편지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이를 통하면 소현세자가 서학(西學)의 보급에 강한 의지가 있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4. 귀국 후 소현세자

1645년 음력 2월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두달 후인 그해 음력 426일에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고양(高陽)의 소경원(昭慶園)에 매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지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염습에 참여한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에 대해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당시 포로로 잡혀간 조선사람들을 모집해 둔전을 경작하고, 그것으로 진기한 서방 물품과 무역을 한 것에 대해 인조가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말이 있다 또한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 조시가 왕과 세자 사이를 이간질하여 소현세자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소현세자에게는 세손인 이석철이 있는데도, 인조는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17대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당시 영의정 김류(金瑬)를 포함한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46(인조 24)에는 소용 조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를 죽였다. 그리고 1647(인조 25)에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도 효종 때인 1656(효종 7)에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조가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 손자들까지 무자비하게 대한 것을 볼 때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소현세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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