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대해 알다보면 인물에 대해서는 과거로 갈수록 좀 더 재미있는 점이 있다.
기록이 많이 없어서 상상의 영역이 넓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이런저런 글을 읽다가 담덕이라는 인물이 대단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담덕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래서 담덕에 대해 알아보니 담덕은 광개토대왕의 어릴적 이름이었다.
내 지식의 부족함에 살짝 부끄러워졌다.
이 기회에 광개토대왕에 대해 다시 한번 알아보았다.
1. 개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년 ~ 412년 음력 10월)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고구려의 제19대 왕이고 이름은 담덕 또는 안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 부르지만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2. 출생과 가계도
훗날 광개토대왕이 되는 담덕은 서기 374년 소수림왕 4년에 당시 국왕이었던 소수림왕의 동생이자 훗날 고국양왕이 되는 왕자 이련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따르면 시조인 동명성왕의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세손 대가 왕대수라는 설과 혈연 상 세대수라는 설이 나뉜다.
서기 384년에 큰아버지였던 소수림왕이 후사 없이 사망한 후 담덕의 아버지인 왕자 이련이 고국양왕으로 즉위하였고 2년 후에 담덕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391년에는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걸로 보이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392년으로 되어 있어 광개토대왕릉비의 391년이라는 기록과 1년의 차이가 있다. 이때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정했다.
3. 백제와의 전쟁
392년 7월 광개토 대왕은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백제의 북방 변경을 공격해서 10여개 성을 함락시켰다.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감히 나가 막지 못하여 한강 북쪽의 여러 지역을 고구려에 빼앗긴다. 같은 해 8월에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격했지만 장수에게 막혀 성공하지 못한다. 같은 해 10월 기세가 오른 고구려는 백제 북방의 주요 요새인 관미성을 포위하여 20여 일만에 함락시켰고 같은 해 12월 진사왕이 구원에서 사망하였다. 백제의 왕은 아신왕이 이어받았다. 아신왕은 빼앗긴 성을 회복하고자 고구려를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공격을 연이어 격퇴하고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약을 방비하였다. 396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한강 이북의 성 58개 등을 점령하고 위례성까지 포위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 대신들을 인질로 삼았다.
4. 거란 및 숙신 정벌
광개토대왕은 392년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때 잡혀갔던 백성 1만여 명을 되찾는다. 395년에는 거란족을 정벌하여 수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또한 398년에는 동북쪽 국경지대에 있던 숙신을 정벌하여 해당 지역을 안정화시켰다.
5. 신라와 연합
고구려가 강해지자 백제는 왜(倭)에 태자 전지를 보내 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적하고자 하였다. 399년에 광개토대왕은 남쪽 정벌을 위해 평양으로 순행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을 때, 신라는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도와주기를 요청하였고 광개토대왕은 5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왜를 격파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금광가야 지역까지 왜군을 쫒았고 이때 금관가야는 그 세력이 약해져 금관가야 중심이었던 가야 연합이 약해져 전기 가야시대가 저무는 원인이 된다고 본다. 이 이후 대가야가 주도하는 후기 가야연맹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은 왜의 세력에서 신라를 구하면서 내물 마립간을 실성마립간으로 교체하고 이후 백년정도 신라 땅에 머무르며 내정을 간섭하였고,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하였다.
6. 후연과의 전쟁
광개토 대왕은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과도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400년 2월은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의 왜군을 격퇴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 후연의 왕이었던 모용성은 고구려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402년에 후연의 숙군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404년에도 후연을 재차 정벌하였다. 그때 지금의 베이지 근방에 위치한 연군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또한 405년, 406년에는 요동 점령을 확고히 했다. 후연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남연과 우호적인 교류를 맺어 지속했다. 후연이 명망한 후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였다. 408년에는 고구려와 북연은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로 인해 서쪽 국경이 안정되었다.
7. 동부여 정벌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공격하여 굴복시켜 동부여를 정복하였다.
8. 내정에서의 치적
광개토 대왕은 평양을 중시하여 399년에는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했는데 이는 왜와 가야,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일 것으로 보인다. 409년에는 동쪽에 6개의 성을 쌓아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 사망
삼국사기에는 413년 10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법을 역산해보면 412년으로 1년의 차이가 있다.
장수왕은 414년에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칭송하였다. 지금 중국 지린성 지안 현에 남아있다. 광개토대왕릉에 대해서는 장군총이라는 설과 태왕릉이라는 설이 나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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