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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장희빈에 대해 알아봅시다.

by 호기심많은 부가옹 2023. 11. 29.

1. 개요

조선 19대 왕인 숙종의 빈이다. 본명은 장옥정이고 중인인 역관 출신이나 왕비의 자리까지 오르고 아들이 왕이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장희빈은 경국지색으로 요부로 알려져 있으나 붕당의 권력다툼의 중심에서 사랑과 정쟁에 휩쓸린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 본명은 장옥정.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장희빈은 유례없이 악독한 경국지색의 요부로 알려져 있지만 숙종의 여인이자 경종의 어머니로서 당쟁과 환국으로 얼룩진 치열한 권력투쟁의 도가니 속에서 사랑과 고통, 갈등과 희망을 한 몸에 품었던 역사의 희생자였다.

 

2. 출생 및 성장

장희빈은 1659년 정9품 사역원 봉사였던 역관 장형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본명은 옥정이다. 장형은 본처 고씨에게서 맏아들 장희식을 얻었고, 고씨가 죽자 조사석 집안의 윤씨와 재혼하여 12녀를 얻었는데 그 아이들이 장희재와 장옥정이었다. 옥정은 종모법에 따라 어머니가 천민이므로 옥정도 천민이 되었다.

옥정이 10살이었던 1669년 아버지 장형이 갑자기 사망하자 숙부가 옥정의 가족을 거두었다.

인동 장씨는 조선 대대로 역관의 명가였고, 그들은 사행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장현과 그의 형제들도 막대한 재력을 갖추었다 한다.

 

2. 궁정생활

성장한 장옥정은 아주 뛰어난 미모를 갖추었다. 여러 인맥을 이용하여 어린나이에 자의대비전의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임금이 매일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다보니 미모가 뛰어났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띄었고 장옥정의 미인계를 이용하고자 했던 남인파의 지원을 받았다.

 

장옥정이 21살 되었을 때 숙종은 20살이었고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했다. 이때 숙종은 장옥정에게 승은을 내렸는데,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 김씨는 서인 출신으로 장옥정을 반대했다. 장옥정으로 남인이 집권할 수 있음을 알자 장옥정을 궁궐에서 내쫒았다.

 

3. 인현왕후의 등장

 

이듬해 1681년 숙종 7, 숙종은 서인의 핵심이었던 민유중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가 바로 인현왕후 민씨였고 이때 나이가 15세였다. 이때 인현왕후는 내명부를 챙기다가 승은을 입은 상궁이 궁궐밖에 있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하여 장옥정을 다시 입궁시키려고 하였으나 명성대비 김씨가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자 명성대비는 이를 걱정하다 병석에 들어 사망한다. 명성왕후가 죽고 국상기간이 끝나자마자 숙종은 장옥정을 입궐시키고 장옥정을 위해 취선당이라는 별당을 지어 주었다.

 

그때부터 장옥정은 숙종을 차지하였고 장옥정의 오빠 장희재도 포도부장으로 특채되었다. 서인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인현왕후에게 회임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은 장옥정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상소문을 올리는 등 장옥정을 내쫒으려고 했으나 숙종은 오히려 종4품 숙원에 봉하고 노비 100구를 하사했다. 이에 경각심을 가진 인현왕후는 새로운 후궁인 김창국의 딸을 받아들이고 종1품 귀인이 되었지만 숙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4. 인현왕후 폐출

1688년 숙종 14년 당시 정2품 소의였던 장옥정은 왕자 윤을 낳았다. 훗날 경종이 되는 이였다. 숙종은 이를 아주 기뻐하여 이듬해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 장옥정을 정1품 희빈에 책봉하였다. 서인들이 극렬하게 반대했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평범한 중인이었던 장희빈의 본가에도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에 추서하는 등 벼슬을 내렸다.

이에 서인들이 아직 어린 정비가 있는데 서둘러 원자를 정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자 기사환국이 발생하게 된다.

숙종은 서인 신료들을 모조리 파직하고 남인을 중용하였고, 서인의 중심이었던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고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해버렸다. 서인을 일거에 축출한 후에는 인현왕후를 폐비로 만들어 사가로 내쫒았다. 그리고 며칠 후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다는 전교로 삼는다는 전교를 내렸다.

다음해 1690년 숙종은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이 끝나자 원자를 세자로 정하였다.

 

5. 갑술환국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서른이 넘어 미색이 퇴조하자 숙종의 애정이 점점 식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은 나인 최씨를 보고 순종적인 최씨를 후궁에 앉혔다.

질투가 생긴 장희빈은 최씨를 매질하기도 하였으나, 숙종의 애정은 깊었고 서인이 정계에 다시 진출하기 시작했다.

1694년 숙종20년 서인들의 진출을 막기 위해 남인파의 우의정 민암은 서인과 인현왕후 민씨 세력의 척결을 청했다. 그러나 숙종은 오히려 민암이 자신을 속였다며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여 남인을 내쫒고 서인을 대거 발탁하였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갑술환국으로 다시 조정을 차지한 서인들은 폐비 복위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에 숙종은 민씨를 다시 입궁시키고 중전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하여 취선당으로 다시 내쫒았다.

 

6. 무고의 옥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여 장희재가 귀양 가게 되고 최숙의가 왕자 이금을 낳자 장희빈은 불안감에 휩쓸려 무모한 시도를 하게 된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고립된 장희빈은 중전이 죽으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중전에 대한 저주의식을 행하였고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그 후 숙종은 장희빈이 벌인 저주 의식을 알게 되고 장희빈 일문에 대한 대대적으로 척결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희빈은 세조의 청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얼마 후 숙종은 후궁은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는 국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남인들과 서인 중 소론 중신들도 조정에서 내쳤다.

그 후 정국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이 장악하게 되었고 영조와 정조이후 세도정치가 일어나는 빌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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