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드라마에서 처음 들은 이름이다. 우리나라 국사책이 남자중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천추태후의 사생활이 음탕하다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탓이기도 할 터이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천추태후에 대해 정리해보려고 한다.
1. 개요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천추태후는 왕건의 손녀이며 경종의 비이자 목종의 어머니로 천추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천추태후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의 유교관에 의해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비난 받았으나 이는 고려의 문화를 무시한 처사이며 근래에 들어 여걸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2. 천추태후의 가계도 및 성장
천추태후는 고려 태조인 왕건의 손녀이고, 제5대왕 경조의 비이고, 제6대왕 성종의 동생이고, 제7대왕 목종의 어머니이고, 제8대왕 현종의 이모이다.
이런 어지러운 가계도가 가능한 이유는 왕건이 호족들의 유화책으로 29개 집안과 결혼을 했고, 왕권 강화를 위해 근친혼을 행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 왕실에서는 흔했던 일이었다.
왕건이 죽은 뒤 왕건의 아들인 혜종, 정종, 광종이 차례대로 왕위에 올랐고 광종의 비인 대목황후는 천추태후의 고모이다. 강력한 왕권 강화를 위해 광종은 호족을 제압하고 6두품과 과거를 시행하여 정계에 진출한 이들을 중용했는데 이 호족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대목황후의 집안과 천추태후의 부모들도 숙청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광종의 아들 왕주가 제5대왕 경종이 된다.
이때 천추태후의 할머니였던 황주원부인은 천추태후와 동생 헌정왕후 자매를 경종에게 시집보낸다. 경종에게는 이미 두 명이 부인이 있었는데 천추태후가 아들을 낳으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였고 그 후 1년 여후에 경종이 사망한다.
이때 왕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경종의 후계자로 천추태후의 오빠인 개령군이 왕위에 올라 제6대왕 성종이 되었다. 성종은 유학적인 소양도 있고 최승로의 시무28조를 받아들이는 등 고려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때 천추태후의 나이가 18살이었고 남편의 사망 후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후 김치양을 만난다. 김치양은 승려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가 훗날 역사가들에게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김치양과의 관계였다. 이때는 조선시대와 달리 미망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였고 천추태후는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마지막까지 김치양과 계속 함께했다. 그러나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던 성종은 둘의 관계를 알게 되자 천추태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를 핑계로 김치양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 버렸다. 성종과 천추태후는 남매 사이로 긴장과 화해를 계속하며 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990년 아들이 없던 성종은 천추태후의 아들인 개령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면서 천추태후는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 무렵 천추태후의 동생으로 경종의 비가 되었던 헌정왕후도 대량원군과 사랑에 빠지고 대량원군의 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게 된다. 이가 바로 훗날 현종이 되는 왕순이다.
3.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천추태후
성종이 사망 후에 목종이 즉위할 때 나이는 18세였다. 어린나이가 아니었음에도 34세였던 천추태후는 섭정을 맡는다. 권력을 가지게 된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불러들여 벼슬을 내렸고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부르고 유교 대신 불교를 장려했다. 북방 변경 지방에 성을 쌓기도 하는 등 강력한 고려를 이루고자 하였다.
목종이 후사가 없자 헌정왕후의 아들인 왕순이 왕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천추태후는 이 상황을 타계하고자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후계를 잇고자 하였다. 왕순을 견제하고자 12살이었던 왕순을 승려로 만들어 개경 숭교사로 보내고 여러번 자객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다. 천추태후는 강종을 불러 목종과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였으나 강조는 오히려 목종을 폐하고 김치양과 두 아들을 포함한 다수를 죽이고 왕순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천추태후는 목종과 함께 궁에서 쫓겨났고 목종과 태후의 행렬이 적성현에 이르렀을 때 강조가 군사들을 보내 목종을 시해했다. 천추태후는 고향인 황주로 유배 갔다. 반란군은 천추태후를 죽이지 않았는데 권력의 중심이었던 천추태후를 죽이는 일이 그만큼 반란군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는 황주에서 21년을 더 살다가 1029년 사망했다.
4. 평가
천추태후에 한 기록은 대부분 현종대의 집권세력이었던 신라계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정적이었던 천추태후와 목종에 대해 객관적으로 기록을 남겼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천추태후가 간통을 저지른 음탕한 여자이자 권력을 탐한 요녀로 서술한 이유일 것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강력한 고려를 꿈꿨던 여걸로서 천추태후를 평가하는 움직임은 근래에야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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