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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지질했던 <인조>

by 호기심많은 부가옹 2023. 12. 1.

세도정치 시대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지질했던 왕을 뽑으라면 선조와 인조를 뽑는다. 그 중에서 인조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1. 인조반정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 이부이다. 선조 40년 능양군에 봉해졌다. 이름은 정이고 아명은 천윤이다. 신경희의 옥사 때 둘째 아우가 죽었고 이때 아버지 정원군이 병으로 사망하자 능양군은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이때 광종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서인일파가 이를 빌미로 반역을 도모하였다.

광해군 12년인 1620년 김류 등은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반역의 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었으나 하루 만에 사로잡혔고 세자였던 이질 역시 반역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능양군은 경운궁으로 가서 11년간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에게 옥새를 바쳤고, 이에 인목대비는 즉각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2. 이괄의 난

인조반정 이후 인조는 광해군의 죄목 36조를 발표하여 반정의 정당성을 설파하였으나 백성들은 동요하였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인조는 백성들에게 명망 높았던 남인 중신들을 등용하였다.

 

반정에 참여했던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김류, 이귀 등은 1등공신이 되었는데 공이 컸던 이괄은 2등 공신으로 삼고 당시 후금의 팽창으로 불안한 북방을 강화하기 위해 이괄을 평안병사 및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이괄 개인적으로는 불만이 있을 만한 일이었으나 국제적 정세를 감안했을 때 적절한 인사였다. 이에 초반에는 이괄도 이를 받아들이고 군사조련과 성책보수에 애쓰는 등 변방의 수비 강화에 노력하였다.

 

16241월 이괄이 변란을 꾀한다는 무고가 인조에 올라갔다. 이에 인조는 이괄의 아들을 잡아들였다. 이를 들고 화가 난 이괄은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군사를 부리는 데 능했던 이괄은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남진하였고 이에 겁에 질린 인조는 공주로 피난했다. 도성을 점령한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국왕으로 옹립하고 백성들을 위무했다.

 

얼마 후 관군의 역습에 대패하였고 이괄은 광주 쪽으로 퇴각하였다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사망했다. 공주로 피난했던 인조는 이괄의 수급을 확인하고서야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괄의 난으로 백성들은 인조도 선조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인조는 이를 달래기보다 거꾸로 기찰을 강화하여 반대파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여 내정은 점차 불안해졌다.

 

3. 정묘호란

광해군 13년인 1621년 후금은 명나라 요동 도사 모문룡이 후금을 위협하자, 조선에 모문룡을 몰아낼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이런 저런 핑계로 후금을 달래면서 위기를 넘기고 있었는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서인 정권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대외정책을 전면 부정하고 후금과는 단절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후금은 1627년 인조5년 병력 3만을 데리고 조선을 침략하는데 이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대피했다. 한양을 지키도록 했던 김상용도 후금군을 피해 강화도로 대피했다. 후금은 화의를 종용하였고, 이에 후금군의 철군과 형제지국의 관계를 정립하지만 명나라와 적대하지는 않는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다.

 

이 강화에 대해 조선은 오랑캐와 형제지국의 약속을 한 것이 굴욕으로 여겼고, 후금 역시 조선이 친명 정책을 계속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4.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에 후금은 조선에 많은 물자를 요구하는 등 조선을 압박했다. 그리고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약탈을 했다. 그리하여 조선 내 불만이 올라가는 중에 후금이 군신지의를 요구하였고 조선이 이에 대한 응답을 미루자 1636년 용골대와 마부대를 파견해 군신지의를 강요했다.

그러나 인조가 접견을 거절하자 둘은 급히 본국으로 돌아갔고 후금은 2차 침공을 결정했다.

 

1636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다. 그해 11월 청은 조선 사신을 보내 왕자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조선이 그 요구를 묵살하자 청 태종은 친히 조선정벌에 나섰다.

 

1636121일 청 태종 홍타이지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향했다. 매우 신속하여 129일 압록강을 넘었고 14일이 되자 개성을 통과했다는 보고가 왕궁에 도달했다.

 

인조는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대피시키고 자신도 강화도로 도망가려고 하였으나 강화로 가는 길이 끊겨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 안에는 13천여 명의 군사와 50일치 군량이 있을 뿐이었다.

 

1216일부터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급보에 달려온 조선군들을 궤멸시켰다. 그 결과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강화론이 점차 강해졌고 척화파 대신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으나 다른 대책이 없었다. 163713일 최명길이 강화제안서를 내놓자 청 태종은 조선국왕의 항복과 척화파 우두머리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직 척화파의 반발이 누그러지지 않았는데 최후의 보루인 강화도가 함락되자 더 이상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을 통보했고 청 태종의 11가지의 항복조건을 받아들였다.

 

1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한강 동편의 삼전도까지 걸어가 청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세 번 큰절을 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을 행했다. 이어 세자와 봉림대군 빈궁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떠났다. 조선은 이때부터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날때까지 양국 간의 군신관계는 계속되었다.

 

5.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은 잡혀간 포로들을 속환시키기 위해 엄청난 재정을 써야했고, 속환된 사대부가 여인들의 이혼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조선의 경제와 기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었다.

 

조선 조정에도 천청파와 배청파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645년 인조24년에 소현세자가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서구의 문명에 접했고 조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귀국 몇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소현세자의 죽음 뒤에 인조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649년 인조 2755세의 나이로 인조는 창덕군 대조전에서 의식을 잃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옹졸하고 군색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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