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은 개혁군주였다. 원나라 지배에 맞서 과강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노국공주와의 사랑과 당대 요승으로 비판받았던 신돈 등을 등용하여 여러모로 많이 회자되는 왕이기도 하다.
2. 당시 국내외 정세 .
한마디로 격동기라고 할 수 있다. 원나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충렬, 충선, 충숙 세 왕은 한 차례씩 폐위되었다 복위하였고 충혜, 충목, 충정은 채 5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위 당했다. 그만큼 국내정세가 불안했다. 그런데 이 당시 원나라도 불안했다. 반세기 동안 황제가 11번이나 바뀌고, 천재, 기근이 횡행하여 백성들의 불안은 높아졌으며 홍건적까지 봉기하여 원나라가 약해지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고려에는 공민왕이 즉위하였다.
3. 왕이 되는 과정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으로 충혜왕의 동복아우이다. 1330년에 고려 여성인 덕비 홍씨에게서 태어난 공민왕은 당시 전례에 따라 12살 때 원나라 볼모로 연경으로 가서 약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21세 때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공주(보타시리)와 결혼하였다.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나라의 내정에 밝아 원나라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변발을 풀고 원나라 의복을 벗는 등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4. 친원세력 숙청
원나라 순제의 제2왕후 기씨(기황후)는 고려여자였다. 태자 애유식리달랍을 낳으면서 핵심 권력을 차지했다. 기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기씨 세력들이 친원 세력의 선두그룹이 되어 고려와 원나라 모두에서 득세하였다. 그런 시기에 원의 쇠락에 용기를 얻은 공민왕이 배원정책을 강화하자, 기씨 형제들은 역모를 일으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자 했다.
공민왕은 이를 눈치체고 기씨 일파를 일망타진했다.
5. 기황후의 반격
자신의 일족들이 숙청당한 사실을 알게 되자 기황후는 공민왕에게 복수하고자 하고 최유를 통해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옹립하고자 한다. 기황후가 원나라 황제를 설득해 덕흥군을 국왕으로 정하자 최유는 요양성의 군대를 빌려 고려로 쳐들어가려고 하였고 1364년 공민왕 13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했다.
이에 공민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시켜 이를 막게 한다. 최유는 재차 침입하고 싶었으나 쇠퇴한 원나라는 고려와의 갈등을 원하지 않아 공민왕 복위를 승인하고 최유를 고려로 압송시켰다.
6. 노국공주의 사망
노국공주와의 사랑은 정략결혼에서 시작했다. 공민왕은 생모가 고려인이라 왕권경쟁에서 번번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1349년 정략적으로 노국공주와 결혼하였고 2년 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365년 공민왕 14년에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사망하였다. 그녀를 그리워한 공민왕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 본래 여색을 밝히지 않아 노국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공민왕은 계비를 들이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나 신돈의 비첩인 반야를 보고 총애하여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훗날 우왕이 된다.
당시에는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로 공인되었으나 훗날 반야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성계 일파에게 폐위된다.
7. 공민왕 집권 후반기 모습
재위 초반에는 자주적인 여러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잦은 전쟁으로 공민왕의 인격이 파탄 나고 노국공주까지 사망하자 공민왕은 폐인처럼 되어갔다. 말년에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성적인 것에 탐닉하였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하기도 했다.
신돈이 실각한 이후에는 더욱 심각해졌다. 자제위를 설치하여 어린 미소년들을 뽑아 곁에 두고 즐겼다.
공민왕은 태후가 우를 세자로 허락하지 않자 후사를 걱정하여 자제위 출신들과 자신의 비빈들을 억지로 관계 맺어 임신을 시키고자 했고 이에 익비는 강제로 임신을 하게 된다.
8. 자제위에 시해당한 공민왕
공민왕은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과 이를 아는 최만생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1374년 최만생과 홍윤은 공미왕을 잔혹하게 시해한다. 공민왕의 나이가 45세였다.
고려의 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한 마지막 등불 같은 존재였으나 훗날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공민왕의 죽음은 처참했다. 공민왕 전의 왕의 원나라의 간섭을 많이 받던 시기로 왕의 이름에 충자가 들어가고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나, 공민왕은 국내외 과정이 달라져 명나라로부터 공민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9. 평가
공민왕의 평가에 대한 사료들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기도 한다. 공민왕 12년을 기점으로 그의 태도가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몹시 영민하던 왕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고, 타국 사신과의 관계에서 남겨진 사료에는 후반기 자료도 훨씬 이성적으로 보인다.
이는 우왕 창왕의 정통성을 훼손 하고 싶어하는 이자겸, 이성계로 이어지는 일파에 의해 폄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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