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은 1902년 3월 12일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에서 아버지 박지수와 어머니 정선동 사이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이고 호적에는 박준식으로 되어 있으나 어려서부터 열(烈)로 불렀다고 한다.
집안은 지방의 전통 깊은 양반이었으나 생활은 궁핍했다고 한다.
7살 때부터 서당 교육을 받다가 10살 때는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집에서 40리, 지금의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의 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중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고 이 학교에서 1919년 3・1운동 때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일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것이 치욕적이라 학업을 포기하고 낙향했다.
고향 문경에서 4월 초부터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일본경찰의 강력한 취체와 고문 상황을 알고 국내 독립운동이 어렵다는 판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1919년 10월 부산에서 도쿄로 넘어가 신문배달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세이소크 영어학원에 다녔다.
이곳에서 반제국주의 자유사상을 지난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이 가네코 후미코이다. 그녀는 오뎅집에서 일하고 있었고 여기서 재일유학생들과 교류했는데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그를 흠모하고 있었다. 둘은 사상적으로 자연스럽게 공감하면서 동거를 시작했다.
박열은 도쿄에서 한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활동하였고 노동자 교육을 위해 야학 활동도 벌였다. 그리고 당시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학자들이 주최하는 각종 사상단체의 강연회에 참여하면서 아나키즘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벌여 도쿄의 학생들을 모아 의혈단을 조직한 후 친일행위자에게 협박장을 보내고 집단 구타하는 등 응징활동을 벌였다.
또한 1921년 11월 29일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를 발간하였다. 한인노동자 학살의 진상을 조사하고 이를 보고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의열단 간부들에게 폭탄 구입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김약수, 백무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한 후 1922년 12월 아나키스트 조직인 흑우회를 조직하고 애인인 가네코와 함께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일본 지식인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고 노동쟁의 후원과 민중강연회에 참여하는 등 일본과 연대한 대중 활동을 펼쳤다.
1923년부터는 의열투쟁을 벌이고자 폭탄을 유입하기 위해 직접 제조를 실험하기도 하고 의열단에게 폭탄구입을 요청해 50개를 반입하려다 일제에 압수당하기도 한다.
그러다 중국에 있던 한인 의열단체인 다물단으로부터 폭탄을 구하고 1923년 10월 일본 히로히토 태자의 결혼식에 투척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9월1일 도쿄 대지진에 이어 한인이 집단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선량한 한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6,200명의 한인이 연행될 때 가네코 후미코와 경찰서에 검속당한다.
이때 취조를 받던 중 폭탄 구입 사실이 알려졌고 이로 인해 1924년 2월 1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 세 사람은 기소된다.
일본 검찰에 기소된 후 1년 8개월의 기간 동안 총 21회에 걸쳐 혹심한 심문을 받았는데 박열은 기죽지 않고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4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는데 그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을 ‘피고’로 부르지 말 것, 둘째, 조선 예복의 착용, 셋째,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넷째, 공판 전에 자신의 선언문을 낭독하게 할 것이다.
일본 사업부는 이 요구를 일부 받아들였고 박열은 조선의 관복을 입고 반말 투로 일왕의 죄를 법정에서 밝혔다.
1926년 3월 25일 가네코 후미코와 함꼐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0일 만에 특별 감형을 요청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박열은 가네코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하였지만 두 사람은 각각 도치키 형무소와 지바 형무소오 옮겨지면서 이별하게 되었는데 가네코는 이에 약 10일 동안 단식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가네코는 1926년 7월 23일 자살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아직 의문이 남아있다. 서둘러 가매장되었던 유골을 4개월 만에 옛 흑우회 동지들의 노력으로 박열의 고향인 문경 팔령산에 묻힐 수 있었다.
이후 박열은 두 차례 이감되었다가 석방될 때까지 22년 2월이라는 장기간동안 수감되다가 1945년 10월 44세가 되어 석방되었다.
1945년 12월 6일 박열의 석방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렸고, 이때 형무소 주임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바치고 자신의 이름도 박정진으로 개명한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도쿄로 돌아와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1946년 신조선건설동맹을 만들어 위원장으로 추대되고 백범 김구선생의 요청을 받아 3열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하는 책임을 맡았다.
18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받아 귀국했으며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장학 사업을 추친하고 1949년 5월 영구 귀국을 하고자 서울에 머물다 6,25 전쟁 때 북으로 압송 당했다.
그 이후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여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1974년 1월 17일 73세 나이에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옥중에 수감 중이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이 사진이 유포되면서 일본 내 큰 파장이 일었다. 이는 두사람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예심판사의 배려에 의해 찍힌 사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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